정치역사

그리스의 정치적 유산

행복한인생사는중 2023. 8. 16.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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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정치

우리는 2500년 전 그리스인이 자신들의 정치제도와 관행에 사용하던 용어들을 물려받았습니다. '정치' '민주주의' '귀족정치' '전제정치' 등이 다 그리스에서 사용하던 용어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의 정치 이념도 공유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자유에 대한 열망, 자주성, 자치 등이 있고,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의 폴리스, 도시국가가 특이한 정치조직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폴리스는 항상 내전이 발발하거나, 바깥의 강대국 또는 다른 도시국가에 정복될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폴리스는 언제 처음 생겨났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기원전 600년경부터 4세기 중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대왕에게 정복될 때까지 번영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직후 기원전 322년 아테네가 마지막으로 독립을 쟁취하려다가 실패했으나 그 뒤에도 폴리스가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스 도시들을 헬레니즘 군주들의 치하에서 기원전 2세기 중반까지 제한적으로 자치를 유지하다가 이후 로마 공화정과 로마 제정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 무렵에는 비참할 만큼 자치가 위축되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일찍이 기원전 5세기 초 20년간 페르시아제국의 침략을 맞아 군사행동과 죽제관계에서의 자유를 수호했으나 결국 가장 귀중하게 여기던 가치를 잃었습니다.

폴리스의 탄생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인들은 자신들의 제도가 어떤 역사를 거쳤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실제의' 역사와 '허구의' 신화를 굳이 구분 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폴리스의 기원은 그들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도 알 수 없습니다. 기원전 4세기 중반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을 시켜 그리스의 정체 158가지를 수집했는데, 그 가운데 아테네의 것만 지금까지 전합니다. 그보다 더 이른 시기의 제도들은 신빙성이 없다고 봅니다. 폴리스가 형성된 과정에 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군사적 견해 다른 하나는 정치적 견해입니다. 한 집단이 단일한 권력 아래 살아가는 데 동의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견해는 시노이키스모스, 즉 '집주'로 포괄됩니다. 어떤 정치적 집합체든 주민들이 공통의 권력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초기 '도시국가'들이 반드시 도시를 기반으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스파르타>

우리는 스파르타를 도시로 여기지만 스파르타인들은 성벽으로 보호되지 않은 촌락을 이루고 산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의 군대가 곧 성벽이었고 '모든 사람이 벽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의 정치체제에 속했습니다. 정치조직의 단일한 유형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초기에는 대게 권력은 물론이고 시민권도 소규모의 귀족 집단들만 누렸고 '왕'이 있는 곳도 더러 있었습니다. 사회가 빈부에 따라 나뉘는 것은 당연했고, 민주주의의 아테네를 비롯해 모든 사회에서 에우파트리다이 라고 불리는 지배 가문들이 정치적 리더가 되었습니다.
 

아테네 민주주의

참주정치가 급진적인 민주주의에 의해 대체된 데는 스파르타의 역할이 컸지만, 그것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스파르타의 정책은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우호적인 과두정을 수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아테네에서는 그 정챙이 실패로 돌아갔고, 급진적인 아테네 민주주의는 중간에 몇 차례 중단되기도 했으나 거의 200년 동안 독립국의 정체로 유지되었습니다. 또한 민주주의는 이후 200여 년 동안이나 급진파의 빈민에게 힘을 주었고 보수파와 부자에게 경고를 전했습니다. 그것은 로마 공화정, 미국과 더불어 정치적 창의성의 획기적인 지표였습니다.
 
그 과정을 시작한 것은 한 명의 기족이었습니다. 그원전 508년부터 아테네 정치는 클레이스테네스가 지배했고, 개혁의 목표는 가난한 시민들을 정치에 참여시켜 군사적 준비를 갖추고ㅗ 사회적 평화를 유지하는 데 있었습니다. 선거권을 가진 하층계급인 테테스는 아테네 함대의 노잡이로 참여했습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핵심>

아테네 민주주의의 핵심은 에클레시아, 즉 민회였습니다. 이것은 현대의 입법, 사법, 행정기구에 해당합니다. 인회의 결정에 항의하려면 다음 민회, 혹은 민회의 일부인 법정을 통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민회는 구성원 총수가 4만 명이었으니 주로 작은 기구들을 통해 활동했습니다. 500명으로 이루어진 법정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불레라는 심의회를 구성하는 500명은 1년간 아테네의 행정을 담당했으며, 30명으로 이루어진 프리타니는 한 번에 한 달 임기로 불레의 운영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클레이스테네스>

클레이스테네스는 시민권과 민회의 회원 자격을 합리화하고, 함대와 육군의 재정을 안정시켰습니다. 인구 대다수가 겨우 먹고사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그 비용은 거의 다 부자들이 부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아테네에는 은광이 많았고 광산에서 부릴 노예도 많았습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늘 전쟁을 벌였습니다. 전쟁이 없으면 곧 다시 일어났고, 전투가 중단된 시기는 무장휴전 상태였습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시민들을 10개의 '부족'으로 편제해 최악의 내부 갈등을 해소했습니다. 이것은 계급이나 친족 집단이 아니라 지리적 집단이었으며, 구성원이 어디에 살든 그 집단이 구성원의 정치적 권리를 결정했습니다. 지리적 단위는 아티카의 데모스. 즉 촌락이었고, 아테네인은 늘 자신의 신분을 이러저러한 데모스 출신의 아무개라고 밝히곤 했습니다. 나중에는 규칙이 더 염격 해져 누구도 평생 두 차례를 넘어 일할 수 없게 까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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