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역사

투키디데스와 역사

행복한인생사는중 2023. 8. 16.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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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역사

아테네의 팽창은 몇 년 동안 다른 그리스 국가들과 간헐적으로 소규모 분쟁을 초래하다가 결국 기원전 431년에 전쟁으로 터졌습니다. 한 측은 아테네와 그 해상 속국들이었고 다른 측은 코린트와 스파르타가 이끄는 동맹이었습니다. 압도적인 군사력 차이를 감안한다면, 동맹 측은 신속히 승리했어야 하는데  그런 전력상의 불균형이 아니라고 해도, 아테네는 전염병이 시를 덮치고, 재앙에 맞서 단합을 유지할 수 있는 인물인 페리클레스가 죽은 직후에 강화를 요구했다면 치욕을 모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27년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아테나가 그 오랜 기간 동안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막아낼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탁월한 창의력과 활력이었습니다. 또한 자금을 모으고 함대와 육군을 무장시킨 것, 걸핏하면 민회가 느닷없이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도 시에 충성을 다하는 유능한 장군을 임명한 것이 한몫을 했습니다. 그로부터 2500년 뒤에도 학자들은 여전히 민주정치와 효율적 행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사고의 덫에 빠져 있습니다. 아테네는 그것이 잘못된 딜레마임을 보여주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전쟁>

투키디데스가 기록을 남긴 덕분에 카이사르의 원정 이전의 어느 전쟁보다도 그 내막이 상세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투키디데스는 정치사상가들에게 큰 존경을 받고 있고, 그들은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투키디데스가 제시한 교훈을 끌어내지만. 그가 서술한 역사가 민주주의의 결함을 탁월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정을 항상 기억하지는 않았다고  투키디데스는 실제로 그렇게 썼습니다. 

 

그는 원래 귀족이자 장군이었으나, 기원전 424년 그리스 북부의 암피폴리스가 스파르타에 항복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그 도시에 가려 했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민회로부터 해임되고 추방을 당했습니다. 전쟁을 아테네의 시각에서만큼 펠로폰네소스의 시각에서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추방으로 그는 아테네에 대한 애정을 잃기도 하였습니다.

 

페리클레스의 장례 연설

 

투키디데스는 흥미로운 글솜씨를 선보였습니다. 펠로폰네소스전쟁사에는 사건을 진전시키는 역할을 하는 연설들이 군데군데 배치되어 전쟁 관련자들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연설이 실제로 있었느냐는 당연한 질문에 대해, 투키디데스는 연설을 한 사실이 확실한 경우에는 그것을 인용했고 확실하지 않은 경우에는 그 정황과 필요를 감안해 자신이 대신 말했다고 대답합니다. 페리클레스의 장례 연설은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보다 길고 2500년이나 더 오래되었지만, 두 연설은 민주정치만이 아니라 민주사회의 정신을 옹호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언으로 폭넓게 인정됩니다. 

 

링컨이 페리클레스의 연설을 모델로 삼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두 연설에는 공통적인 수사가 보입니다. 두 사람은 자신의 말이 전사사들의 명예를 드높이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그 자체로 말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두 사람은 전사자와 더불어 조국의 건국자들을 찬양했습니다. 그들이 목숨으로 지키려 한 사회와 정체를 찬양했습니다.

 

멜로스의 대화편

투키디데스는 사건의 참여자들이 직접 했던 연설 또는 '상황에 따라 필요한' 연설을 중심으로 역사를 구성했습니다. 그 덕분에 그 방대한 책은 놀라우리만큼 생생했습니다. 전략적 분쟁의 가장 유명한 사례는 아테네와 멜로스의 다툼입니다. 기원전 416년 아테네는 멜로스 측에 항복과 조공을 요구했습니다. 조공은 아테네의 전쟁 자금으로 사용될 터였지만, 멜로스는 중립의 권리를 요구하면서 그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테네는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연력의 모든 남자를 죽이고 아녀자들을 노예로 팔아넘기겠다고 집요하게 협박했습니다. 이것은 평판이 좋은 사회가 저지른 가장 잔혹한 만행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고삐 풀린 권력의 양상을 보여주는 좋은 역사적 사례이기도 합니다.

 

"정의란 같은 힘을 가진 세력들이 대립할 때 결정되는 것이고, 현실은 힘센 쪽이 강요하고 약한 쪽이 따르는 것"이라는 아테네 쪽의 주장을 놓고 이후 일반인들도 철학자들도 많은 토론을 벌였으나, 모두가 아테네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투키디데스는 멜로스가 단지 중립 유지만을 바랐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사실이 아이였습니다. 멜로스는 전쟁 초기부터 스파르타를 지원했고, 멜로스인들은 아테네가 장차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었습니다. 레스보스 섬의 미틸레네는 전생 초기부터 기원전 427년까지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때 스파르타는 멜로스의 호플리테스와 해군을 지원했습니다. 도시가 항복하자 아테네는 섬의 성인 남자들을 죽이고 아녀자들을 노예로 삼기로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레스보스에 있는 병사들에게 그 지시를 전달하기 위해 함대가 떠나자마자 아테네 민회는 곧바로 마음을 바꿔 살육 명령을 취소하는 함대를 또다시 보냈습니다. 다행히도 첫 번째 함대가 천천히 이동하는 동안 두 번째 함대가 그 함대를 추월하여 10년이 지나도록 전쟁을 질질 끌게 되자 아테네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개전 후 15년이 지나도록 아테네도, 스파르타도 우세를 잡지 못했습니다. 이 결과는 아테네의 슬리나 다름없었습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 시와 제국을 파괴하는 게 목표였던 데 반해 아테네는 기존의 상태를 유지하는 게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페리클레스의 목표는 그랬습니다. 많은 그리스 도시들이 아테네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스파르타는 자유와 자격에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스파르타가 헬로트를 어떻게 다룰지는 뻔했습니다. 스파르타 병사들은 전투에서 한껏 자제력을 보였으나 아무래도 본국이 아닌지라 타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스파르타의 정책은 아테네보다 더 노골적으로 사리사욕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만약 아테네가 패배를 모면하는 데 만족했다면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그 못표를 좌절시키는 데 만족해야 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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