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홉스에 관하여
근대
버지니아 울프가 "1910년 12월에, 혹은 그 무렵에 인간 본성이 변했다"라고 썼을 때, 그녀의 태도는 유쾌하고 도발적이었다. 사상사가와 정치이론가들이 최초의 '근대' 정치사상가 홉스냐, 마키아벨리냐, 둘 다 아니냐를 놓고 토론할 때 그들의 태도는 자못 진지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기본적으로 회고형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성공적인 정치체제는 로마 공화적이었습니다. 로마가 성공한 원인에 관한 그의 생각은 폴리비오스의 생각과 매우 비슷했습니다. 로마는 안정적이고, 법을 잘 지키고, 군사적으로 세계 최강이었습니다. 시민들은 충성스럽고, 공공 정신이 투철하고, 용감하고, 자제력이 강했습니다.
홉스는 후대의 저자들처럼 진보의 관렴에 호소하지 않고, 그를 고용했던 프렌시스 베이컨처럼 인간을 편안하게 만들어준 과학의 가치에 찬사를 보내지도 않지만, 문명 세계와 비문명 세계의 차이, 예컨대 16세기 영국과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 세계의 차이가 정치, 지성, 넓은 의미에서의 기술에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생애와 시대
토머스 홉스는 영국의 가장 위대한 정치사상가이며, 정치학에 관해 영어로 글을 쓴 저자들 중 가장 대담하고 흥미롭고 도발적인 인물입니다.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거나 가장 현명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의 많은 적들조차, 거들먹거리는 반대파를 전부 합친 것보다 그가 더 그을 잘 쓴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윌트셔의 맘스버리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곳의 시골 목사였습니다. 대학생 시절 홉스의 삶에 관해서는, 끈끈이에 치즈 조각을 붙여 새를 잡는 취미를 가졌다는 것 이외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옥스퍼드를 나온 홉스는 데번셔 공작 아들의 가정교사이자 보호자가 되었고, 내전이 중단되었을 때 그는 캐번디시 가문과 인연을 맺고 이후 평생을 그들과 함께했습니다.
최초의 정치학자
홉스는 정치학이 그 자신보다 오래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키케로, 마키아벨리, 에라스뮈스 등 역사가와 수사학자들이 역사적 증거에 입각한 조언과 소박한 도덕적 충고를 전했고, 수사적 솜씨를 과시한 바 있었습니다. 홉스는 자신이 최초로 과학적 기반 위에서 정치를 이해하려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진정한 정치학의 성립을 가로막는 주요 장애물이 스콜라 학자, 사제, 교수, 수사학자, 반계몽주의자의 사리사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홉스의 지적 편력과 충성의 방향은 상당히 복잡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학자로서 이름을 날라고 싶었습니다. 그가 번역한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도 그렇지만, 라틴어 '자서전'을 비롯해 그가 쓴 수많은 라틴어 시들은 세련되면서도 힘이 넘칩니다. 잘 알려졌듯이 기하학을 접하고 새로운 물리학을 발견한 뒤 그는 광학에 열정을 보였으나 동시에 학문적 충돌과 다툼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결과는 좋지 않았고, 특히 월은 정사각형으로 바꾸는 문제를 놓고 월리스와, 전공의 가능성을 놓고 보일과 벌인 논쟁이 그랬습니다.
'리바이어던'과 과학
홉스의 정치과학은 인간 본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 그 지식을 얻을 수 있는지 말해줍니다. 그는 '리바이어던'에서 우리의 열정과 견해에 관해 설명한 뒤,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자기 자신에게서 똑같은 고통을 찾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에게서 온 고통을 고찰할 수밖에 없다" 이런 종류의 학설은 다른 증명 방식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홉스는 우리가 가진 욕망과 혐오의 본질과 그 대상을 뚜렷하게 구분합니다. 우리가 욕망을 회피하는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같은 사람이어도 시간에 따라 다릅니다. 그러나 열정의 본질은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입니다.
홉스가 생각하는 인간 본성
리바이어던은 인간 본성과 인간생활에서 이성의 역할에 관한 대단히 설득력 있는 설명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인간존재가 감각, 이성 감정을 갖춘 완전한 물리적 체계, 자언적인 자동기계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인가의 지적 능력에 대한 그의 설명은 주로 두 세기 전부터 그의 시대까지 횡행했던 스콜라 학자들의 견해에 관한 격앙된 논평입니다.
그래서 홉스는 우리가 신에 관해 말하는 내용이 실은 전혀 신에 관한 게 하니라고 주장합니다. 그의 체계는 욕망과 혐오를 목적론적이 아닌 기계적으로 이해하는 기반 위에서 작동합니다. 즉 우리 내부의 어떤 것이 우리를 원하는 것으로 몰아가거나, 피하고자 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의 욕망은 우리가 자연적으로 이끌리는 본성에 각인된 목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구성된 방식에 의해 설명됩니다.
행동의 최종 목적을 정하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 아니라 선을 향한 타고난 충동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인간 본성의 목적론적 이해는 거부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본성 속에 각인된 가치를 보았다면, 홉스는 우리 자신의 우리의 욕망과 혐오를 감안해 본성에 각인한 가치를 본 것입니다.